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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스토리×디자인] 의자가 있는 만화, 만화가 있는 의자

2019-06-29

만화 속에 나타난 20세기 디자인 아이콘들 

 

만화가의 임무는 독자의 관심을 끌어가며 독자가 계속 읽어 나가도록 그림과 대화를 펼쳐 나가는 것. 칸칸이 이어지며 펼쳐지는 잘 만들어진 코믹스의 세계는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려운 흥미진진한 평행 우주다. 단편 만화(cartoon)와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과 달리, 코믹스(comics)는 여러 칸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다수의 박스 또는 패널 이미지들을 이용해 이야기를 펼친다. 그런가 하면 만화는 그림을 그리고 말풍선 속에 대사를 써넣는 만화예술가만의 독특한 스타일에 따라 결정되는 독립된 예술 장르이기도 하다.

 


만화는 수준 낮은 대중매체? 아니! 소설의 서사성과 그래픽 예술의 수공업적 예술의 결정체이자 이야기 속에 당시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물적 자취를 담고 있는 시각적 자료실이다. 데이빗 마주켈리(David Mazzucchelli)의 〈아스테리오스 폴립(Asterios Polyp)〉 중, 2009년. ⓒ Pantheon Books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고 했던가. 만화가는 주인공과 대화 풍선 속 대사 이외에 미묘한 배경 요소와 계산된 디테일을 삽입해 넣어 은연중 독자의 의중과 무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기법을 쓴다. 특히 20세기의 만화가들은 주인공 묘사 외에도 다양한 주변 환경 묘사를 통해서 다채롭게 주인공의 캐릭터를 묘사하고 앞으로 벌어질 스토리에 복선을 암시했다. 면밀히 기획되고 실행된 코믹스의 세계는 그 시대 인간이 만들어낸 물적 흔적과 산물을 엿볼 수 있는 고고인류학적 보고(寶庫)라 할 만하다.

 

특히 20세기 대중문화계에서 큰 인기를 끌며 성장한 만화 산업은 당시 미술과 디자인 트렌드와 그들이 등장인물들과 어떤 시공간적 관계를 맺으며 존재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위) 휴머와 만화를 디자인의 소재로 작업하는 하비에르 마리스칼(Javier Mariscal)의 만화 〈가리리스(Los Garriris: Este verano te vas a enamorar (detail)〉 1977년. ⓒ Javier Mariscal. (아래) 만화를 실제 디자인으로 실현시킨 가리리스 의자, 1987년 ⓒ Vitra Design Museum, Photo: Jürgen HANS.

 

 

1920년대 말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프랑스-벨기에 만화의 고전 〈땡땡의 모험(The Adventures of Tintin)〉(1929~1976년 연재)처럼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된 스타일의 만화는 그 시대 패션, 헤어스타일, 건축, 도회와 자연 풍광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게 상세히 표현해 두었다. 실제로 땡땡을 창조한 죠루쥬 레미(Georges Remi, 필명 에르제(Hergé)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모더니즘 디자인 아이콘들을 의도적으로 만화 속에 잘 그려 넣었는데, 〈토넷 14번〉 의자와 미스 반 데어 로헤의 〈MR-10〉 의자(1927년 작)의 형태와 기능주의는 자신의 만화 스타일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다.

 

웬저 매케이의 히트 신문만화 연재작 〈리틀 네모〉 중 세부, 1907년. Courtesy: Vitra Design Museum, Weil am Rhein.

 


비슷한 시기,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도 신문 만화 연재가 유행하기 시작하며 만화 산업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만화가 윈저 매케이(Winsor McCay)가 연재한 컬러 만화 〈리틀 네모(Little Nemo in Slumberland)〉(1905~1924년 연재)는 꼬마 네모가 꿈속에서 온갖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다. 흑백 일색의 성인 남성만을 위한 딱딱한 신문 편집에 총천연색 일요일판 신문에 매주 실린 만화 섹션은 신문 매출 상승에 기여한 당시의 흥행 콘텐츠가 됐다.

 

임스 의자, 나비 의자, 스칸디나비아풍 라운지 의자, 전후 추상회화로 장식돼 있는 실내를 묘사했다. 찰스 슐츠(Charles Schulz)의 〈피너츠〉 중 한 장면, 1953년 ⓒ 1953 Peanuts Worldwide LLC.

 

 

1950년대 신문 연재용으로 출발한 어린이용 네 칸짜리 만화 〈피너츠(Peanuts)〉(1950~2000년 연재)와 1960년대부터 이탈리아에서는 펄프픽션 살인범죄 만화 장르로 〈다이볼릭(Diabolik)〉 시리즈가 만화 시장을 평정했다. 20세기 후반 대중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기 높던 경찰 범죄수사 스토리를 12×17cm의 소형 포켓판 만화 시리즈로 출간해 휴대하기 좋은 만화책 콘셉트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당시는 2차 세계 대전 후 유럽과 미국의 경제 재건 시대이던 만큼 이 시리즈를 그린 안젤라와 루치아나 주사니(Angela and Luciana Giussani) 만화가 자매는 섬유유리 소재와 주입 몰딩 기법으로 제작된 최신 20세기 미드 센추리 디자인을 대중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등장인물을 시대 유행에 맞는 현대적인 실내 인테리어와 가구가 있는 환경 속에 배치함으로써 주인공들이 ‘현대적’인 캐릭터라는 신호를 독자에게 전달했다. 안젤라와 루치아나 주사니 공저 〈디아볼릭(Sergio Zaniboni and Saverio Micheloni, Diabolik)〉의 한 장면, 1974년 ⓒ Astorina srl.

 

 

1960년대는 특히 미국이 주도한 팝 문화와 팝 미학이 만화의 세계에도 향을 끼쳤다.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같은 미술가들이 상업적 대중 미학을 미술로 도입하며 기존의 이른바 ‘고급 미술’과 만화를 포함한 ‘저급 미술’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때다. 특히 마블 코믹스나 DC 코믹스 만화책들이 쏟아낸 슈퍼히어로, 공포, 공상과학, 로맨스 장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피에르 쟈코모와 아킬레 카스틸리오니(Pier Giacomo and Achille Castiglioni)가 디자인한 〈스누피〉 램프, 1967년 ⓒ Vitra Design Museum, Photo: Andreas Jung.

 

 

이때 유럽과 미국의 산업 디자이너들은 우주시대 미래주의 미학에서 영감받은 낙관적 분위기를 반영해 동글동글하고 유기적인 형태를 띤 가구와 인테리어를 디자인했다. 만화가들은 곧바로 만화 속으로 옮겨 그 시대 유행을 반영했고, 또 디자이너들도 대중문화현상으로서의 만화를 디자인의 영감으로 삼았다. 그 같은 예로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두 거장 디자이너 피에르 쟈코모와 아킬레 카스틸리오니(Pier Giacomo and Achille Castiglioni)는 〈스누피〉 만화에서 착상해 장난스럽고 앙징스러운 조명 램프를 디자인했다.

 


모리스 칼카(Maurice Calka)가 디자인한 〈부메랑 책상(Boomerang Desk)〉은 1960년대 우주시대에 영감받은 유기적 곡선과 밝고 낙관적인 분위기를 만화풍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1969 ⓒ Vitra Design Museum, photo: Jürgen HANS.

 

 

이에 영감을 받은 특히 유럽의 산업 디자이너들은 코믹스 미학을 디자인에 끌어들이고 만화적 미학과 유희적 가벼움을 콘셉트로 한 디자인을 실험했다. 모리스 칼카의 〈부메랑〉 책상(1969년)과 에에로 아아르니오의 〈토마토 의자〉(1971년)는 그 대표적인 예다. 이어서 감성과 유희적 디자인의 시대 1980년대에 오자 만화예술가 겸 디자이너를 자처한 하비에르 마리스칼은 미키 마우스를 연상시키는 〈가리리스〉 의자(1987년)로 만화 미학 디자인을 실험했다.

 

귀도 크레팍스(Guido Crepax)의 〈발렌티나〉(detail)는 직업이 사진기자인 여성이 단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판타지 공상과학과 에로티시즘을 버무린 성인용 만화다. 1975년 ⓒ Guido Crepax, courtesy by Archivio Crepax.

 

 

1965년 〈발렌티나(Valentina)〉라는 현대적 여성 캐릭터를 탄생시켜 사이키델릭했던 1960년대 특유의 분위기를 만화로 묘사해 큰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만화가 귀도 그레팍스(Guido Crepax)는 여주인공이 그 시대 유행에 맞춰 시크한 옷차림을 한채 그 유명한 20세기 아이콘인 〈임스 라운지체어(Eames Lounge Chair)〉에 걸터앉아 오토만에 다리를 올려놓고 책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만화가는 이 한 칸의 만화 그림을 통해서 ‘임스 라운지체어에 앉을 때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가구 사용법을 독자에게 은근슬쩍 가르쳐준다.

 

무민은 디자인 평론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939년 설립된 건축사무소 그루포 아우스트랄(Grupo Austral)에서 디자인한 〈나비 의자〉(1938년)는 핀란드 만화 〈무민〉(1958년)의 한 장면에서 등장한다. 주인공은 이 나비 의자는 앉기 불편하고 테이블에 놓인 물건을 잡기 어렵다고 불평한다. 
(왼쪽) 토베 얀손(Tove Jansson)의 〈무민(Moomin)〉중에서, 1958년 ⓒ Solo / Bulls. (오른쪽) 그루포 아루스트랄 디자인 사무소(Antonio Bonet, Juan Kurchan, and Jorge Ferrari-Hardoy)가 디자인한 〈나비 의자(Hardoy Chair / Butterfly Chair)〉 1938년 ⓒ Vitra Design Museum, photo: Jürgen HANS.

 

 

누가 만화를 어린이를 위한 유치한 그림 이야기에 불과하다 말할 것인가? 독일 바일-암-마인에 자리한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Vitra Design Museum)에서는 코믹스의 세계 속에 등장하는 20세기 디자인 아이콘들을 통해서 만화 예술과 디자인 사이 오간 창조적 영감과 관계를 살펴보는 전시회 ‘상자 속의 디자인과 코믹스(Living in a Box : Design and Comics)’를 오는 10월 20일까지 전시한다.

 

글_ 박진아(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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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 칼럼니스트
사회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미술사가·디자인평론가로 현 월간미술 오스트리아 통신원, 미술·디자인·문화 분야 기고가·서적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1994~1997년 뉴스위크 한국어판, 1997년 월간 디자인의 객원기자로 시작해 2013년까지 정기 기고했다. 1998~2000년 미국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 뉴욕 모마, 이탈리아 베니스 구겐하임 컬렉션에서 일한 후 2000년부터 현재까지 오스트리아에서 미술과 디자인 분야에서 기고 및 번역 일을 하고 있다. 개인 홈페이지(Jinapark.ne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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